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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끈질긴 짝사랑일상 2024. 5. 22. 23:39
참외와 진보라색 꽃을 담은 꽃병. 꽃병에 담긴 찬물 때문에 생기는 뿌연 성에와 아스파라거스 화분.
방을 뒹굴던 스피커로 틀어놓은 뉴에이지 음악과 금붕어가 그려진 쉬폰 커튼까지. 별것 아닌 것들의 집합이 나를 짝사랑으로 이끈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굉장한 추억이 있지 않는 이상. 아니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뿐이지 땀범벅인 한낮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고 스스로를 그 정답 안에 가두었다.
내내 초여름만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다. 딱 그 초입까지. 생일과 장미의 언저리까지.
그런데 오늘처럼 가슴에 박히는 순간들이 있다. 엘리베이터 공사로 14층을 올라오는 내내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내고 선풍기를 튼 채로 참외를 깎아 먹는 밤. 또 선물 받은 마음들이 방 안에 물건으로 변모하여 나를 자꾸만 멋진 취향을 가진 어른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좀 더 더워져도 행복할 거라는 착각에 물들었다가 어쩌면 짝사랑은 범위를 점점 제 스스로 늘려가는 게 아닌가. 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생각한다.
막내동생이 좋아하던(이제는 질려하는) 1인용 쇼파를 작은 내 방으로 꾸역꾸역 가지고 왔다.
비좁은 방에 비좁게 앉아 쭈구려 읽는 소설과 겨우 낚은 산갈치를 자랑하는 게임은 사랑을 번지게 하는 재주가 있다.
어차피 계절과 지구는 인간을 사랑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끈질긴 짝사랑이다.
기후위기로 자비로워진 여름의 길이에 자칫 사랑에 단 맛을 핥아보지만 열대야를 간과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다. 단문이 없어 스스로를 맹비난하다가, 어차피 일기일 뿐이라고 또 나를 위로한다.
끝없어서 징그러운 자기위로의 나날들.
결국엔 남는 것은 백골을 끌어 안은 나?일까 고민하다가 와삭 - 하고 참외를 반쯤 앞니로 끊어낸다.
오늘 있던 어리숙한 내가 떠오르는데 어라라 나쁘지가 않다. 그때에는 내가 싫어 퇴사하던가 울던가 둘 중 하나만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둘 다 참아낸 내가 대견스러워지기까지. 방영된 촬영분과 발표된 소설은 기록이라 정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토할 것 같다가도 어쩔 수 있나 참외를 또 아삭 -
여름은 거지같은 기억도 떨쳐내게 만드는 건가 보다. 여름밤은 자기혐오에 특효약인 걸 알아냈다. (이수림 한정) 내일도 혐오하며 내일도 떨쳐내고 살자. 매일 긍정적일 수는 없어도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시간을 꼭 갖자고 다짐한다. 탱탱볼처럼 부풀어 오르는 지방세포들아! 고맙다! 탄수화물에서 나오는 회복탄력성을 나는 모르지 않아!
생일을 지난 5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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