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쓸쓸한 금발 가발. 신원불상의 그녀는 선글라스 너머로 술잔을 넘기는데, 그게 몇 잔째인지 나는 셀 수가 없다.
그녀가 마시는 술은 죄다 내 안으로 들어 갔기 때문이다. 되려 취하는 건 나여서 우리의 대화를 기억할 수가 없다.
새벽에 술 취한 남녀가 으레 그래 하듯 우리는 자연스럽게 호텔방에 도착했다. 내가 원했던 일이었다.
다만 내가 원했던 이유는
내게 이별을 말했던 그녀를 잊기 위해서.
그래서 금발 그녀의 옷을 벗기지 못했다.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을 먹어치운 후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어디 있는 여자로부터 오는지 고민했다. 침대에 시체처럼 늘어진 이 여자인지. 전화조차 받지 않는 그 여자인지. 어쨌든 여자로부터 비롯되는 허기를 애꿎은 음식을 괴롭히는 것으로 끝을 보려 했다.
*
총성과 불법체류자들.
믿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두 손안에 피스톨이 뜨거워지는 것은
내가 흔들리는 탓이다. 구두굽은 마지막 변장.
아주 여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위장.
알 사람들은 모두 아는 쫓기는 사람의 대표작.
*
금붕어가 늘어난 줄도 모르면서, 생명을 지키는 경찰을 하겠다니 우습지.
네 집의 슬리퍼가 소파 아래서 갈증에 아사하는지도 모르는 민중의 지팡이.
내가 사랑하는 지팡이.
캘리포니아에서 기다릴게요. 그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 그 말은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
앞으로도 우린 사랑할 거라는 말.
비밀리에 지키던 사랑과 꿈이 길게 늘어져 비행기가 이륙할거라는 말.
*
춤인지 청소인지. 핑계인지 짝사랑인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 하지만 당신 앞에서는 구분하지 않을 수도 있지.
같은 메뉴와 같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을 수 있지.
그러다가 같은 메뉴가 다른 메뉴를 권했을 때, 우리가 이름을 헷갈렸을 때. 자리가 뒤바뀌고 그 자린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운이 자욱해. 이제 내가 기다리지 뭐. 그 정도쯤이야.
허세인지 사랑인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
하지만 당신 앞에서는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