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1

함장님! (선우정아 - 도망가자)

Rim_thinking 2021. 1. 17. 09:11

 

 

도무지 시작할 수 없었던 소설의 물꼬를 튼 새벽. 어울리는 노래를 찾다가 한 때 나를 울렸던 노래와 조우했다.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였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무엇을 써야 할지 엉망진창이고, 호르몬의 전쟁 덕에 온몸이 붓는다.

 

가끔 한 번씩, 그래 가끔. 이제껏 살아온 모든 날들이 꿈같다. 눈을 번뜩하고 떴을 때 헝클어진 나를 직면한다.

 

오직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소리만 팽창하는 지금이다. 거울 앞에 앉아 나를 오랜만에 목격한다. 이렇게 작았었나. 나는 이렇게 바닥에 붙어 있었나.

 

놀라움에 멍해지면 더욱 엉킨 것 같이 생긴 내가 보인다. 어쩜 좋아. 탄식과 한숨이 두통을 불러온다. 

 

스스로에게 ‘어쩜 좋아.’라고 말하는 밤이 있다. 살아온 날에 관한 후회는 아니며, 해온 것에 대한 반성도 아닌 그저 꼴이 이게 뭐야. 라고 말하고 싶은 밤.

 

나는 나를 매 시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인정하고 얕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릎에 손을 얹고 세게 밀면서 일어선다. 창문을 열어볼까 하다가 코끝에 스치는 온도에 아차 하고 이불속으로 몸을 옮긴다. 꼿꼿이 서 있는 책장을 노려보다가 팔짱을 낀다. 

 

태생에 건방진 건지 도도한 건지 습관적으로 팔짱을 낀다. 남들에게 예의 없게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런 소리는 잘 듣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장점을 곱씹었다. 기분이 훨 나아졌다. 

 

자, 이제 생각을 해볼까. 생각다운 생각을. 

 

소설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지? 새벽이라는 잠수함 속 나는 함장이 된다. 불시점검.

 

팔짱을 낀 함장은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는다. 자기 전에 먹은 음식이 아직 소화전인 것 같다. 그러니까 처먹지를 말라니까. 어휴. 

 

무슨 생각하지? 

 

아닙니다! 섬세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얕은 상처를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깊은 공감과 눈물을 가진 사람이 살기에 삶은 얼마나 잔인하고 파괴적인지 파고들 생각입니다! 

 

그것 하나 설정해놓고 맘 편히 있나? 그러면 써야 할 거 아니야! 전속력으로! 속도 올려! 개강 전 까지는 퇴고 두 번이 목표다! 

 

예! 

 

함장은 만족스러운 듯이 자리로 돌아가려다 멈춘다. 잠깐. 그리고 정적. 

 

초입에 선우정아는 왜 언급이 없나? 불친절하고 무책임한 수필은 이제 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 너만 아는 얘기할 거면 다이어리에 하란 말이야!

설명 없이 감정만 쏟아내는 글이 흑역사다! 왜 남한테 투정을 글자로 해! 잉크랑 데이터 아깝게!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몰라?

 

위아래로 작아지는 함장의 눈. 지가 만화 캐릭터도 아니고 뭐야. 

 

예, 예! 그 선우정아 도망가자는! 

 

아 그만, 그만. 분위기를 바꿔서.

살고 있는 동안에 나는 종종 내 몸에 붙어 있는 끈끈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깨에 가족들, 팔다리에 친구들,

날개뼈에 관심은 없지만 필요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종아리 뒷 근육에 나를 욕하는 사람들,

허리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무릎에 말은 안 하지만 나와 항상 닿고 싶은 사람들.

허벅지에는 나와 닿아 있지만 떨어지고 싶은 사람들,

볼에 잠깐 만났다가 사라질 사람들. 

 

스티커를 붙였다가 남은 회색의 끈끈이는 그렇게 천리만리 떨어지지 않고 늘어져서 내 발을 공중에 잠깐 띄운다.

발끝을 아래로 접으면 가끔 땅에 닿는 정도. 사람은 다들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간당간당한 채로.

한 그룹이라도 떨어져 나가면 그대로 균형을 잃겠지.

그 끈끈이에서 나로부터 이어지고 너에게 닿은 이 선들 사이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말 없이 툭 털어 내고 내 발로, 내 의지로, 내 속도로 걷고 걸어서, 결국엔 숨이 가쁠 때 까지 뛰어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딱 그쯤 듣게 된 노래였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너의 맘이 편할 수 있는 곳 

그게 어디든지 얘기 해줘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가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어디로든 어떻게든 

내가 옆에 있을게 마음껏 울어도 돼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괜찮아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나만은
너랑 갈 거야 어디든 

당연해 가자 손잡고 사랑해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노래를 듣고 실컷 울은 뒤, 홀로 있던 시간에 다시 한번 다이빙했다.

그땐 손잡고 도망갈 사람이 없었으니까. 내 슬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외로움과 우울은 소설에게 좋은 먹이일 뿐이니까.

누군가는 바쁘고 누군가는 귀찮아서 누군가는 돈이 없고 누군가는 돈을 나와 쓰기 싫으니까.

나와 도망갈 사람 따위 없으니까. 그게 어쩌면 당연하니까.

 

삶이, 그 끈끈이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이젠 나는, 오늘의 나는 손을 뻗길 기다리는 입장에 서 있지 않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러고 싶다.

 

나는 안기기보다 안아주고 싶어.

왜냐하면 당신이 있어서, 당신이 주는 눈빛만으로도 나는 두렵지 않으니까.

 

끈끈이에서 가뿐히 벗어날 용기가 생기니까. 그 위에서 줄을 타며 곡예도 할 수 있어.

당신이 도망가고 싶다면 내가 기꺼이 끌어안고 전속력으로 달릴 테니까.

 

나도 당신도 삶 속에선 미아다. 우주에서 길을 잘 안다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지만 함께 손잡고 미아인 건. 그렇다면 탐험이 되잖아.

 

탐험 속에서 지치면 작은 헝클어진 미아는 꽤나 야무지게 머리를 묶고 새 옷을 꺼내 입고, 나는 웃을 거다. 입 꼬리가 뾰족하게 말려 올라간다.

 

그리고 도망가자, 하고 말할 거다.